흥선대원군은 조선의 3대 개혁가이다.
기묘사회의 조광조, 김유(?)와 더불어서 흥선대원군이 삼대장이다.
19세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기울고 있는 조선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일으키려고 했는가? 왕조시대로 돌아가서 일으키려고 했다.
과거로 회귀하려고 했던것이다. 미래지향적이지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온고지신이라고 약간 쎄련되게 잘 했으면 되는건데 실패했으니까 까는듯 싶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대외정책과 대내정책으로 나뉜다.
먼저 대내정책 대내상황을 보면 19세기에 정치적으로 소수가문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세도정치가 흔했고 매관매직이 심 했다. 관직을 사고파니깐 세금체제는 당연히 문란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세금체제가 문란해진 것을 삼정문란이라고 보 면 된다)
이 삼정문란을 개선하기 위해 삼전이정청을 만든 적이 있는데 실패했다.
이 삼정이정청과 관련있는 사람은 박규수씨다.
아무튼 흥선대원군은 이런 대내상황 문제점들에 빡쳐서 왕권강화+민생안정을 하려고 했다.
먼저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세도정치의 핵심인 비변사를 폐지시켜버렸다.
그리고 비변사가 가지고 있던 독점적인 권한을 나눴는데 행정은 의정부로, 군사는 삼군부로 넘겼다.
민생안정을 위한 개혁이라 함은 법령을 고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먼저 대전회통을 개정했는데 원래 있었던 경국대전과 뭐를 만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각 부서들의 시행법들을 만든 육전조례도 만들어서 기강을 잡았다.
그리고 경복궁도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서 폐허로 남아있었는데 왕궁이 폐허로 있으면 왕실의 권위가 없는것 아니겠는가? 해서 경복궁을 재건시켰다. 지금 있는 경복궁이 흥선대원군때 복원된 것이다.
그런데 이 경복궁을 재건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원납전이라고 처음에는 원해서 납부하는 돈이었는데 나중에는 원망하면서 납부한 돈을 만들었고 당백전이라고 돈을 하도 찍어내서 인플레이션 심해져서 돈 하나에 일당백 하던 돈을 찍어냈다.
그리고 경복궁을 짓기 위해 나무들이 필요해서 양반들의 묘 옆에 있는 묘지림을 베어다가 쓰니까 양반들이 개빡쳤다. 감히 무덤의 나무를 파헤치고 돈을 걷어내?
그리고 지방의 서원들을 과감하게 정리했다. 47개만 남기고 싹 정리했다.
중앙정부에서 지방권력을 쳐낸거다. 지방세력? 개빡쳤지.
만동묘를 폐지했다.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와주었던 명나라의 황제를 모시고 있던 사찰같은 곳으로 선비들의 의리와 명분의 상징이었는데 이것 을 없애버렸다. 선비들? 개빡쳤지.
이런식으로 흥선대원군은 선비나 양반들에게 욕쳐먹으면서 지방세력은 짜르고 중앙집권화, 왕권강화했다.
또 민생개혁을 위해서 세금체계를 정리했는데 전정/ 군정/ 환곡을 손봤다.
- 전정 : 토지신고를 안하니까 탈세를 하네? 양전사업을 도입했다. (토지조사 > 새로운 세수 확보 > 국가재정 넉-넉)
- 군정 : 호포제라는 것을 했다. ** 군대를 가는 대신에 원래 포를 냈는데 기존의 양반들은 그마저도 안냈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이제부터 공평하게 양반들도 군대 안가려면 포를 내라고 했따. 군대문제 지금도 예민한데 그것을 무너뜨리니 양반들 개빡치지.
- 환곡 : 공무원들이 봄에 곡식 빌려주고 폭리 취해서 가을에 고리대금해서 걷었다. 빌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강제로 빌리라고 해서 나중에 고이율로 수금해갔다. 그래서 사창제를 도입해서 해결했는데 사창제란 마을에서 사적으로 창고를 알아서 운영하라는 것이다.
이런것을 보면 전반적으로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ㅇㅈ? ㅇㅇㅈ
그런데 아무튼 왕권강화든, 민생개혁이든 기득권세력들에겐 개빡치지.
지금으로 치자면 보수세력이라고 할까나? 아무튼 개빡치니까 총대를 멘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최익현.
바로 탄핵 상소를 올린다.
고종이 22살이 되던 시절, 흥선대원군 쳐버리고 직접 다스려주세요! 하고 요구한다.
그래서 받아들여지고 흥선대원군 내려온다.
(참고로 최익현은 개항반대도 하고 을사의병에서도 활약한다)